[설교] 2018년 1월 14일 – 주님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

노스욕 한인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1월 14일

마태복음 5 : 6
“주님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

– 송만빈 목사

마태복음 5 :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녹음 상태가 좋지 못하여 설교문으로 대체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 (마 5:6)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이민의 삶이 척박하고 힘들다고는 합니다만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충분히 부요함을 누리고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사회적 혜택과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은 전세계 인구 70억명 중에 10%도 누리지 못하는 혜택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풍요의 땅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풍요로움을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할지 모르겠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더 피폐해져가고 각박해져간다는 것이에요.
보세요. 이 시대의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는 건강 관리와 명성과 재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하늘을 향한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어서, 하나님이 비집고 들어가실 마음의 공간이 없어 보여요.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 들어온 자들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지, 풍요 속에서 빈곤을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빈곤 속에서도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그 유명한 팔복 중 하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이고, 이런 자들에게 복이 있는 이유가 배부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또한 어떤 의미인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구절을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자면, ‘의를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어딘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표현 자체도 우리에겐 익숙한 표현이 아니에요.
그런데, 원어대로 “의를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하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의는 무엇입니까?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정의, 공의잖아요.
네, 분명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것을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에요. 징계를 해서라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려는 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의나 공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굳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표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의를 가르치고 준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부부 사이에서 의롭다 함이란 남편은 남편 역할 잘하는 것이고 아내는 아내 역할 잘하는 것이에요.
남편이 남편 역할 똑바로 하지 못해서 아내가 힘들게 되고 가정이 힘들게 되면 의로운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아내 역할 똑바로 하지 못해서 남편 스트레스 받으면 의로운 아내가 아니에요.
자, 그러면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남편 역할 100% 완벽하게 하는 사람 있나요? 아내 역할 완전하게 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남편의 역할을 그리고 아내의 역할을 남들보다 더 잘 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100% 완벽하게 감당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뿐이겠습니까? 제가 부부 사이만 예를 들었을 뿐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관계 역시 완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관계에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완전하게 이룰 순 없어요.
왜 그런가요? 그 이유는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맺게 되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이 관계가 어그러지고 깨어졌으니 당연히 다른 관계 역시 어그러지고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3:10에서 천명한 것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의로움을 이룰 수 있는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관계의 의로움이 이루어져야 사회의 정의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이것을 가능케 할 능력이 없다는 거에요.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엄연한 현실인데 주님은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관계에서의 완전한 의로움을 갈망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따라서 어찌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산상수훈의 팔복은 하늘나라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이상적인 생각이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해요.
주님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제가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지는, 고후 5:21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 대신해서 죄로 삼으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는 결국 예수님이 의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의가 아니시라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없어요.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란 궁극적으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고 있는 거에요.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갈망하는 자, 예수님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헬라어 원문이 왜 “의를 주리고 목마른 자는”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요.
우리는 산상수훈을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 가르침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분명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어요.
산상수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늘나라 그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하늘나라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자체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 산상수훈의 핵심 메시지인 셈입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바깥면만을 보았을 때에는 의란 ‘정의, 공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서 안쪽을 들여다 보면, 관계에서 비롯되는 역할을 완전히 감당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가장 안쪽을 들여다 보면, 의란 다름아닌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이런 점에서 의라는 한자 단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는 뜻 글자라서, 글자 안에 글자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로울 ‘의’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시죠? 의로울 ‘의’자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동물 양 ‘양’자와 나를 가리키는 ‘아’자가 합쳐진 글자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양 밑에 내가 놓여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생각이 나왔을까요?
양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리고 내가 왜 양 밑에 있어야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갑골문자를 만든 고대동방사람들에게 양은 신에게 드리는 희생제물을 상징했을 겁니다.
따라서 제사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결국 양 밑에 내가 있는 것이 의라는 말은 예수님 아래 내가 있을 때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 소름끼칠 정도로 놀라운 거에요.
그렇습니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아래 내가 있어야 의로워질 수 있어요.
어린 양 제물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밑에 내가 있어야 의로운 자가 되는 겁니다.
살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한방울의 피까지도 아낌없이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어야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짐을 받을 수 있는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아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 아래 놓여져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여러분의 죄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어요.
그것은 의가 되시는 주님을 날마다 주리고 목말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표현, 헬라어 원어로 보면 현재 능동태 분사로 씌여졌어요.
이 문법적 표현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단지 지금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시제가 아닙니다. 꾸준히 지속되어야 하는 상태를 강조할 때 쓰는 시제에요.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말은, 주님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일회적 사건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거에요.
그리고 능동태란 주어가 어떠한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란 결국 우리가 능동적으로 주님을 간절히 바래야 한다는 의미이며,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를 원하신다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꾸준히 지속적으로 의가 되시는 주님을 배고파해야 하고 목말라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향한 이러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관한 구절이 많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시 42:1에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그리고 시 63:1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영적 갈망을 엿볼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느헤미야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서 하면, 대개 느헤미야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 아래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어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쉬운데,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단순히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의 영적 성벽이 재건되어진 것이 느헤미야서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느 9장입니다. 특별히 9:1-3을 제가 읽어드릴께요.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우리 말 성경에는 낮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영어 성경은 the day, 그 날이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영어 성경의 번역을 따르자면, 유다 백성들이 그 날 사분지의 일, 즉 6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보냈고, 또다른 6시간을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보냈습니다.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만큼, 그것도 앉아서 편안하게 낭독한 것이 아니라 6시간 내내 서서 낭독할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했다는 것이에요.
6시간 동안 죄를 회개하고 예배드릴만큼 영적 갈급함과 간절함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을 향한 이런 배고픔과 목마름이 생겼으면 합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에 없으시겠지만은, 이 갈망이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샘솟아오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 중 팔복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그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의도를 넌지시 드러내시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주님을 믿으라는 거에요.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을 주린 배를 쥐어잡을만큼, 목마른 사슴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것만큼, 간절히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6시간을 선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보냈고, 또다른 6시간을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보냈던 유다 백성들의 영적 간절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할 때 주님 한 분만으로 배부르며 만족하는 복된 인생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세요.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무엇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나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날마다 주님을 향한 주림과 목마름이 지속되어서 주님께 가까이 하는 그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심령이 배부르고 만족을 누리는 복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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