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 주 설교는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설교문으로 대체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노스욕 한인 교회 주일 설교
2015년 2월 8일
요한복음 13장 1 – 35절
“새 계명”
– 송만빈 목사
아내를 만나 결혼한 지 벌써 16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세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 주님과 교회 그리고 성도님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었으면 사랑이 뭔지 대충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더욱 커져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내뱉는 것이 조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비록 주님의 사랑을 자신있게 외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면이 많지만,
저 또한 말씀에 비추어 고침을 받고 도전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 앞에 여러분과 함께 서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주시며,
새 계명을 주신 목적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단지 서로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새계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세상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경우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만, 원래 부부는 사랑하는 사이지요.
부모와 자식도 서로 사랑합니다. 친구끼리의 우정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예수님의 계명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계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는데,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요 13장에 국한해서 보자면, 두 가지 장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20절에 언급하고 있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21-30절에 언급하고 있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이 두 장면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먼저 첫번째 장면을 보도록 할까요? 14-15절입니다.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천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더 낮은 자가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주인이 무릎을 꿇고 낮아져서 종의 발을 씻어 줄 수 있으며, 더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씻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십니다.
그리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상대방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며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지요.
낮아짐, 겸손! 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종과 같이 낮아지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겸손’이 영어로 humility이고, ‘겸손한’은 humble인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Humility와 humble의 어원은 humus입니다.
그리고 인간 (human)의 어원 역시 똑같이 humus입니다.
그렇다면 humus가 가지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부식토, 거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참 생뚱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어떻게 거름이라는 뜻을 지닌 humus에서 겸손이나 인간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지 의아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거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거름은 유기물이 분해되어져서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썩은 게 거름입니다.
좋은 거름은 많이 썩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몸이 미생물과 벌레들에게 갉아 먹혀 갈기갈기 분해되고 썩어져야 질 좋은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살아있으면 거름이 될 수 없어요.
낙엽이 썩지 않으면 거름이 되지 않습니다. 풀들이 썩지 않고 살아있으면 거름이 될 수 없어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겸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내 자아가 살아있으면 겸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 자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겸손하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정한 겸손은 할 수 없어요.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또다른 교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겸손한가요? 내 자아가 죽어짐으로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있나요?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름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거름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식물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서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거름을 준 땅과 거름을 주지 않은 땅에서 자라는 채소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거름을 준 땅에서 자란 채소는 병치레도 적게 하고 튼실합니다.
하지만 거름이 없어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채소는 병에도 잘 걸리고 잘 자라지 못합니다.
거름은 식물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해야 해요.
그 생각과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차 있고 자기 욕심만 챙기며 타인의 삶에 아무런 선한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인간 됨됨이가 안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인간 됨됨은 주님처럼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겸손 즉, 썩어지는 거름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며 선한 영양분을 공급해 줄 때 인간으로서의 참된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썩어진 한알의 밀알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있도록 거름이 되신 겁니다.
그가 채찍을 맞은 것은 여러분과 제가 나음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의 살을 갈기갈기 찢으셔서 부식토가 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황폐해 버린 여러분과 저의 마음의 밭에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남김없이 땅에 쏟으셔서 거름이 되신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겸손의 사랑입니다. 거름과 같이 썩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뿐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하게 무릎 꿇고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 가정,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두 번째 장면은 21절로 30절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장면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배신당할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막지 않으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헤아려 보았으면 합니다.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동거동락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웃으셨고 우셨습니다.
따라서 한몸이나 다름 없는 관계이지요.
그런 제자들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21절에 보듯이 예수님의 심령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괴로움에 빠져 듭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클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알고도 배신당하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끔직합니다.
그런데 괴로움으로 그 심령이 상할대로 상하신 예수님께서 12제자 중 한 사람이 당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보세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내가 떡 한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범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 보는 앞에서 가룟 유다에게 그 조각을 주시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알아차려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룟 유다가 회계보는 일을 맡고 있으니 유월절에 쓸 물건을 사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어요.
서로를 의심하고 어느 누가 그런 몹쓸 짓을 할지 궁금했지만 그게 전부였던 겁니다.
자신들의 인생을 모두 맡긴 예수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들 안에 있는 한 사람에 의해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의심은 했고 궁금해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4복음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4복음서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생략했는지 모르겠지만 저 같으면 분기탱천했을 겁니다.
저 같으면 “주님! 누굽니까? 그런 인간을 그냥 내버려둡니까? 그 인간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요. 저희들이 끌고 나가서 먼지나도록 패서 정신차리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 중 한사람에 의해 예수님이 팔리신다는 것보다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정신이 더 팔려 있어요.
눅 22:23,24을 보세요. 먼저 23절을 보면,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라고 서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말하고 있어요.
주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보다 누가 큰지가 더 중요한 겁니다.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개판인 거에요.
이러니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우리 같으면, 3년 동안 가르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러 나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배신의 보응으로 복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같이 아무런 반항없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왜죠? 본문 1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러 나가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네,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해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세요.
그런데 31절을 보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곧바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고 있나요?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룟이 주님을 팔려고 나갔는데, 어떻게 이것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고 하나님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이 괴로움으로 인해 밀랍처럼 녹아내리셨을텐데 유다가 당신을 팔려고 나가는 것이 어찌하여 영광을 받을 일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영광의 시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의 때와 다릅니다.
사람들은 성공하는 것을 영광의 때로 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업 잘 되고 자녀들 하버드 예일 대학교 들어가는 때가 영광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느 때를 영광의 때로 보시는 것입니까?
부활이나 승천이나 재림의 때인가요? 네 부활, 승천, 재림의 때도 분명 영광의 때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하늘 보좌로 올라가시고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시는 승리의 순간들이니 당연히 영광의 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의 때는 십자가의 때입니다.
왜 제자의 손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은 삼십에 팔려가시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 영광의 때입니까?
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영광의 때입니까?
사람은 어느 누구나 죽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살기 위해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왜 그러셔야 했나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까?
누군가로부터 더 나아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상황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사랑은 영광을 받고 섬김과 경배를 받기에 마땅한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낮아지셔서 발을 씻기신 겸손의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희생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계명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방식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들 방식으로나 내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민의 삶, 힘듭니다. 내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실천하기 너무나도 버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날개가 거추장스럽다고 해서 날개를 떼어버리는 새가 있나요?
돛이 무겁다고 해서 그것을 잘라버리는 선원이 있습니까?
물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의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지요.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의 은혜에 잠길 수 있나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지를 묵상할 때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씀을 암송하세요. 그리고 힘들 때마다 마음 속에서 묵상해 보세요.
자 그러면 모두 함께 ‘자기 사람들’ 대신 여러분 이름을 넣어서 한번 말해 볼까요?
“세상에 있는 만빈이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번에는 우리 교회를 넣어서 다 함께 외쳐 보지요.
“세상에 있는 노스욕 한인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노스욕 한인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름아닌, 여러분 발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여기셨기에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받으셔야 할 배신을 감수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 깊이 묵상하셔서 주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리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 할찌라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서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